당신의 침묵이 역사가 될 때까지그 소년은 우리를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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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룡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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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 그 소년이 우리를 묻다!
이 영화를 보라.
"Truth 그리고 Treason" (진실과 반역)
이 영화를 꼭 보기를 권한다. 아니, 간청한다.
이 영화를 보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당신은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눈물이 나지 않는다면, 부끄러움이 밀려오지 않는다면, 당신 안의 양심은 이미 죽은 것이다.
나치 독일의 암흑기, 열일곱 살 소년 헬무트 휘베너는 죽음을 알면서도 진실을 외쳤다. 단 한 번의 삶, 십 대의 짧은 생을 불의에 저항하는 데 바쳤다.
그 소년의 마지막 순간을 보고도 당신이 아무렇지 않다면, 당신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당신은 그저 숨 쉬는 기계일 뿐이다.
이 영화를 보라. 그리고 당신 자신에게 물어라.
나는 아직 인간인가.
진실 앞에 선 우리들에게...
영화 한 편이 가슴을 짓누른다.
나치 독일의 암흑기, 불의에 맞서 단 몸으로 진실을 외쳤던 열일곱 살 소년의 이야기. 그 영화를 보고 돌아와 창밖으로 흐르는 현재의 대한민국을 바라본다.
가슴이 무거워진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십 대 소년이 할 수 있었던 것을 우리는 왜 하지 못하는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이유
영화 속 주인공은 죽음을 알고 있었다.
절대 권력에 거역하는 댓가가 무엇인지,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면서도 펜을 들었다. 전단을 뿌렸다. 진실을 말했다.
그 소년을 움직인 것은 무엇이었을까. 살고 싶은 욕망보다 큰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자존감인가, 양심인가, 아니면 이 세상의 기본적인 옳고 그름에 대한 확신인가.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죽음의 위협도 없고, 감옥의 위협도 없다.
단지 헤아려지지 않는 댓글과 눈총이 있을 뿐이다.
단지 불편함과 귀찮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침묵한다.
정치인들에게...
국회의사당 안에서 당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신들이 입에 달고 사는 '국민'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회의장에서 고성을 지르고, 주먹을 휘두르고, 상대를 악마로 만들며 표를 모으는 것이 정치인가.
열일곱 살 소년은 죽음을 무릅쓰고 진실을 외쳤다.
당신들은 안전한 국회 안에서 무엇을 외치고 있는가. 당신들의 그 화려한 말들 속에 진실은 몇 퍼센트나 있는가.
선거 때만 고개 숙이고, 당선되면 국민을 잊는다.
이념을 팔아 편을 가르고, 분노를 증폭시켜 지지자를 모은다.
당신들이 만들어낸 분열이 이 땅의 가족들을 갈라놓았다.
밥상머리에서, 명절 자리에서, 심지어 장례식장에서조차 사람들은 정치 이야기를 꺼내기 두려워한다.
당신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내뱉는 말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그럼에도 계속한다면, 당신들은 그 소년이 목숨 걸고 싸웠던 바로 그 불의의 편에 서 있는 것이다.
법조인들에게...
법정은 정의의 마지막 보루라 했다.
그런데 그 법정에서 돈이 판결을 바꾸고, 권력이 형량을 좌우하고, 연줄이 무죄를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이미 법정이 아니다.
그것은 거래소이고 시장이다.
판사복을 입은 당신들, 검사 배지를 단 당신들, 변호사 가운을 두른 당신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정의를 실현하고 있는가, 아니면 정의를 팔고 있는가.
열일곱 살 소년은 부정한 재판정에서 당당했다.
죽음을 선고받는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어떤가. 밤에 잠들 때, 당신들이 내린 판결이 정말로 정의로웠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당신의 양심이 "그래도 먹고살아야지"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가.
법이 불의한 자의 편에 서는 순간, 그 사회는 무너진다.
그 소년이 피로 증명했던 진리를, 당신들은 로비와 청탁으로 배신하고 있다.
언론인들에게...
진실을 전하는 것이 당신들의 직업 아니었나.
그런데 지금 이 땅의 언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떤 언론은 권력의 나팔수가 되었고, 어떤 언론은 이념의 선전도구가 되었다.
클릭 수를 위해 자극적인 제목을 뽑고, 조회수를 위해 분노를 부추긴다.
심지어 유튜브에는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거짓들이 범람한다.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퍼지고, 사람들은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당신들은 그것을 보면서도 침묵한다.
아니, 때로는 동참한다.
열일곱 살 소년은 진실을 알리기 위해 전단을 만들었다.
목숨을 걸고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렸다.
그런데 당신들은 무엇을 알리고 있는가. 진실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이익인가.
기자증을 목에 건 당신들에게 묻는다.
그 소년의 전단지와 당신들의 기사 중 어느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운가. 당신들은 그 소년보다 더 용감한가, 아니면 더 비겁한가.
노조에게...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는 것, 그것은 숭고하다.
그러나 그 권리가 특권이 되고, 그 투쟁이 밥그릇 싸움이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정의가 아니다.
귀족 노조라는 말이 왜 생겼는가.
정규직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민을 볼모로 잡는다면, 그것은 투쟁이 아니라 횡포다.
열일곱 살 소년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모두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
소수의 안락이 아니라 다수의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당신들의 투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정말로 약자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이미 가진 자들의 더 많은 몫을 위한 것인가. 파업으로 멈춰 선 지하철 앞에서, 운행이 중단된 공장 앞에서, 국민들은 묻는다.
"당신들의 정의는 우리의 불편보다 더 소중한가?"
진정한 투쟁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자신만을 위한 목소리는 투쟁이 아니라 이기심이다.
진보를 외치는 당신들에게...
정의를 말하고, 평등을 외치고, 인권을 강조하는 당신들.
당신들의 그 신념은 진심인가.
당신들은 스스로를 도덕적 우위에 놓는다. 자신들이 깨어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정작 당신들의 진영에서 벌어지는 부정의는 보지 못한다. 내 편의 잘못은 용서하고, 상대편의 실수는 만 배로 부풀린다.
열일곱 살 소년은 진영이 없었다.
단지 진실과 거짓이 있었을 뿐이다. 옳음과 그름이 있었을 뿐이다.
당신들은 어떤가. 진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위선을 보고도 침묵한다.
평등을 외치면서 자신의 자녀는 특권을 누리게 한다. 부패를 규탄하면서 자신의 진영에서 일어나는 부패는 눈 감는다.
그것은 진보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기득권일 뿐이다.
진정한 진보는 자기 편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진영을 넘어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념보다 양심이 앞서야 한다. 그 소년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
그 소년 앞에 서면, 우리는 모두 부끄럽다.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 노조, 진보, 보수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진실을 외면하고, 편의를 택하고, 안락함에 타협해왔다.
열일곱 살 소년이 죽음으로 지켜내려 했던 것이 무엇인가. 진실이다. 정의다. 인간의 존엄이다. 그것은 이념도, 진영도, 이익도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간다.
죽음의 위협도 없이, 고문의 공포도 없이, 단지 불편함이 두려워서, 귀찮음이 싫어서.
그 소년이 우리를 본다면 뭐라 말할까.
"당신들은 자유가 있고, 권리가 있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데도, 왜 침묵하십니까?"
"당신들이 가진 것을 저는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했고, 당신들은 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당신의 침묵이 역사가 될 때까지...
역사는 기록한다.
당신이 오늘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를. 당신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어떤 침묵을 지켰는지를.
나중에, 훗날, 당신의 자녀가, 당신의 손주가 묻는다. "그때 할아버지는 뭐 하셨어요? 그때 할머니는 어디 계셨어요?"
당신은 뭐라 답할 것인가.
"나는 몰랐다"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나 하나쯤이야"라고 할 것인가.
열일곱 살 소년은 "나 하나"를 믿지 않았다. 그는 "나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죽었다.
당신은 살아 있다. 당신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계속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마침내 목소리를 낼 것인가.
그 선택이, 당신의 역사가 된다.
그 소년이 보고 있다.
우리 모두를.
당신의 침 묵이 역사가 될 때까지, 그 소년은 우리를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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